김원웅은 1944년 중국 충칭에서 태어났으며 2022년 기준 나이 79세 이다. 그는 조선의열단 김근수 선생과 여성 광복군 전월선 여사의 장남이다.
그의 부모는 백범 김구의 중매로 연을 맺었으며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대전에 정착했다. 김원웅은 대전중.고를 거쳐 서울대 정치학과를 다녔으며 중화민국정부의 장학금으로 중국 국립 정치대학 대학원에 유학했다.그는 대학생 시절 박정희정부의 한일조약체결 반대운동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졸업 후 집권당인 공화당 사무처 공채에 합격하여 정당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생긴 민자당 합류를 거부하고, 박찬종, 노무현, 이철 등과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이후 1992년 14대 총선에 출마하여 국회에 입성했다. 제정구, 이부영, 유인태, 원혜영 등 초선의원 12명과 함께 ‘깨끗한 정치 실천선언’을 하여 모든 정치인, 공직자의 재산공개, 정치자금공개를 주도했다. 1995년 일제잔재인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는 교육법 개정을 주도했다. ‘가장 깨끗한 정치인’으로 정치부 기자들이 뽑기도 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지역주의 청산을 내세우고 (꼬마)민주당 후보로 대전 대덕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낙선 후 노무현, 제정구, 유인태, 이철, 원혜영, 박석무, 김홍신 등과 ‘하로동선이란 상호로 식당을 개업하고 대표는 김원웅이, 감사는 노무현이 맡았다.
1997년 (꼬마)민주당과 신한국당이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되었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 대전 대덕에서 출마, 충청권에서 유일하게 한나라당 당선자가 되었다. 하지만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민족화해협력 반대와 기득권층 비호의 노선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당내 갈등이 심화되었고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했으며 개혁당 창당에 이어 당대표를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시절 비공개 특사로 평양을 방문, 민족평화축전 개최를 합의하고, 해방 이후 최대의 남북공동행사였던 민족평화축전을 2003년 10월 제주도에서 마쳤다. 일제가 약탈해 간 문화재의 환수위원회를 결성하고, 평양을 방문, 남북공조로 북관대첩비, 조선왕조실록 및 조선왕실의궤를 되돌려 받기도 했다.
2004~2006년 국회 윤리특별위원장의 직책을 맡았다. 2006~2008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으로 한미FTA협상에 임하면서 미국을 10여 차례 방문, 미국 의회와 국무성의 고위인사와 담판하여 스크린쿼터제를 지켜냈고, 개성공단제품을 한미FTA에 포함시켰다. 또한 반기문 UN사무총장의 선거대책위원장 역할을 해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4당 연합후보(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로 대전시장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11년부터 현재까지 독립운동가들인 안중근, 윤봉길, 여운형, 신채호, 김성숙, 이회영 선생 등의 뜻을 기리는 20여 기념사업회들이 뭉쳐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고 그 대표를 맡고 있다. 현재 강원도 인제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허준약초학교’(사회적 협동조합)를 운영하며, 귀촌·귀농희망자에 대한 지원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의 '친일 행적'에 비판했다.그는 "친일 미청산의 거의 99%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며 "해방 이후 미국에 빌붙어서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 국가 이익을 챙긴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안익태에 대해서는 비단 그의 친일 행적 뿐 아니라 애국가 곡조도 불가리아 민요를 60여군데 표절했다며 즉각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반미 성향의인사로 한나라당 의원 시절에도 미군 철수를 주장했고 열린우리당 입당 이후에는 노무현 정부나 여당 사람들에게도 한미동맹을 강조하거나 이라크 파병을 지지하면 숭미사대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과 인권을 비판하자 한반도를 평화 위해서라면 한미동맹을 포기할 수도 있다며 선택하라면 한미동맹을 포기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논란]
2022년 1월 말에 김원웅 개인적인 비리 의혹과 김원웅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를 광복회를 통해 일감을 몰아주는 등 비리의혹이 거론되면서 국가보훈처의 감사를 받게 되었고 감사결과 비리의혹이 사실로 밝혀지고 가족회사 비리 건도 상당수 사실로 밝혀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결국 2월 16일 기습적인 임시총회 승인하는 행보를 보이다가 스스로 사퇴를 하며 광복회장서 내려왔다. 그러나 사퇴 회견서도 조선일보와 TV조선의 공작에 당했다는 것과 부하를 잘못 기용했다며 사과문을 낭독하고 떠났다.
학력사항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대전고등학교
대전중학교